유시민 작가는 때로는 지나치게 논리적이어서 아이러니하게도 논리의 함정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노유진>이나 <썰전>에서 여러 이슈에 대해 종종 유시민 작가의 예측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그의 예측에 동의하기 어려웠던 적이 많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예측은 빗나간 적이 많았다.
너무나 치밀한 논리가 선행된 예측인데 왜 그렇까?
나는 그 이유가 바로 너무 논리적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너무 논리적이라는 말은 예측을 하기 위해 과거의 사실이나 법칙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왜 역사를 읽는가’라는 질문과 만난다.
사람들은 종종 역사를 통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믿는다.
<역사의 역사>에서 유시민 작가는 이 생각에 동의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미래를 예측할 때를 보면 역사에 크게 의존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나는 미래 예측에서 과거의 중요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과거의 경향이나 규칙은 하나의 참고자료로 봐야지 그것들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예측은 실패하기 쉽다.
그 이유는 주식시장을 보면 너무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주식투자의 전문가는 주가의 과거 흐름을 관찰하여 패턴을 발견한다.
그들은 방송에서 그 패턴을 소개하고 책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그 패턴의 수명은 그리 길지 않다.
왜냐하면 이 패턴을 시장에서 사람들이 인지하는 순간부터 서서히 그 패턴을 역행하거나 역이용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자연현상과 달리 인간의 역사는 반복하지 않는다.
이유는 인간이라는 복잡한 동물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역사의 역사>에서 유시민은 인간의 역사에 대한 마르크스의 예측이 틀렸다고 결론짓는다.
하지만 나는 그 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참고로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님을 명확히 밝힌다)
그 이유를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첫째, 마르크스의 이론과 예측은 오히려 상당 부분 정확했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승리하게 되었다.
예측이 정확해서 결과적으로는 예측이 틀리게 된다는 말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자본주의 옹호자들은 마르크스의 이론과 예측이 상당히 설득력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결점을 사전에 지속적으로 보완할 수 있었고 결국 혁명에 의한 자본주의의 붕괴를 피할 수 있었다.
만약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한계와 문제를 누설하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공산주의가 승리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 점은 유발 하라리도 공감하는 부분이다.
둘째, 마르크스는 사실 프로레타리아 혁명을 예측한 것이 아니라 창조한 것이다.
만약 그가 <공산당 혁명>이나 <자본>과 같은 책들을 쓰지 않았더라면 자본주의는 공산주의가 아닌 다른 이데올로기와 대립했을지 모른다.
예를 들면 자연환경을 중요시 여기는 이데올로기와 경쟁 했을지 모른다.
만약 그랬더라면 더 나은 오늘이 오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아니면 노동자 집단의 의식을 깨울 다른 이데올로기의 저항에 부딪혔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핵심은 그가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인간의 의식 속에 창조했다는 사실이다.
즉 그는 미래를 예측한 것이 아니라 미래를 창조하고자 했다.
만약 그가 시골에서 혼자 남몰래 그런 책들을 썻고 오늘날 우리가 그것을 발견했다면 우리는 그의 예측이 맞고 틀렸음을 논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그는 생존 당시 이미 요주의 사상가였고 그의 책이 유명세를 타는 바람에 그는 이 나라 저 나라 도망 다녀야 했다.
즉 그는 객관적 관찰자로서 미래를 예측한 것이 아니다.
그는 역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역사적 주체였던 것이다.
보다 친근한 두 가지 예를 들어보자.
기상청이 내일 미세먼지가 “매우 나쁠 것”이라고 예측한다고 치자.
이것은 말 그대로 예측이고 내일이 오면 이 예측의 진위를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기상청은 내일 미세먼지의 농도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한편, 최근 언론사들은 유시민 작가가 차기 대권 후보라고 떠들고 있다.
이 예측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다음 대선에 유시민 작가의 선택을 봐야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엄밀하게 보면 예측이 아니다.
나는 유시민 작가가 대선에 나오리라고 상상조차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어느날 언론사들이 그가 대선 후보로 나올 수 있다고 예측하는 순간 그것은 나의 뇌에서 가능한 현실의 하나로 인식된다.
나 뿐만 아니라 유시민 작가 자신과 전국민에게 이것이 가능한 새로운 현실로 창조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예측한 마르크스와 유시민의 대선 출마를 예측한 언론사의 행위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밝힌 것처럼 미래는 예측의 대상이 아니라 창조의 대상임을 마르크스는 알고 있었다.
역사에서 미래는 인간의 정신에서 창조된다.
만약 이 미래를 대다수가 원하면 실현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지 않다면 이 미래는 원하는 자와 원하지 않는 자 간의 치열한 전투에서 결정된다.
이 경우 예측이 타당하면 할수록 저항이 커지고 예측은 실패의 고배를 마시게 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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